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의 후진지역인 남부 사르디니아에서 출생하였다. 세 살 때 우연한 사고로 꼽추가 되는 신체적 장애와 불안한 가정환경 속에서 고학으로 튜린 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시절까지 확고한 사회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1913년에는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했다. 그 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에 자극을 받아 1919년부터 신질서(Ordine Nuovo) 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공장평의회 운동을 주도한다. 이 운동은 튜린에서 급속하게 확대되었으나, 사회당의 소극적 태도와 자본가들의 방해로 1920년 4월을 기점으로 실패하게 된다.

그람시는 공장평의회 운동의 실패 후, 사회당의 타협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성향과의 단절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1921년 1월 이탈리아 공산당(PCI)를 창당하고, 지면을 통해 자유주의의 위기와 파시즘의 등장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1921년 코민테른이 연합전선을 채택하였을 때, 당내에서 연합전선을 지지하는 세력과 분열을 겪게 된다. 이 시기는 경제적 위기와 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 파시즘이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였다. 파시즘에 의한 탄압 속에서 그람시는 당의 고립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성향을 쇄신시켜 당을 반파시즘 투쟁을 위한 조직으로 변형시키고자 노력한다. 결국 1926년에는 그의 입장이 당의 공식적 입장으로 채택된다. 그람시의 활동으로 공산당은 대중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확보할 수 있었으나, 1926년 11월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투옥되고 만다.

 

그람시는 투옥 후 1937년 사망까지 옥중에서 그의 실천적 경험과 사색을 이론화하여, 총 3천 여 페이지의『옥중수고』로 정리한다. 그는 볼셰비키들이 국제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고 레닌의 업적 전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연대를 주장하였다. 농민계층에 대한 점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대립도 존재한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스탈린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람시 만이 감옥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감옥에서 쇠약해진 그람시는 1937년 4월 가석방조치로 옮겨진 병원에서 사망한다.

(1) 헤게모니의 개념

그람시에게 있어서 헤게모니 개념은 가장 중심적 개념이고, 그의 독창적인 사상 전체를 연결해 주는 개념이다. 그람시는 『옥중수고』를 쓰기 이전에는 레닌적 의미인, 노동계급이 다수 인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혁명 전략으로서의 헤게모니 개념을 수용한다. 그러나 옥중수고에서는 초기의 레닌적 의미의 헤게모니 개념 외에 자본가 계급이 지배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그 의미를 확대하고, 전체사회에 동의의 획득을 위한 지배라는 새로운 의미를 추가시킴으로써 독창적인 헤게모니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출발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의 이중적 성격에 대한 파악에 기초한다. 그는 모든 지배는 강제와 동의, 힘과 헤게모니, 폭력과 설득의 양자의 조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여기서 헤게모니는 힘의 수단에 의한 지배의 관계가 아니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지도력의 수단에 이한 동의의 관계를 의미하게 된다. 한 사회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확산하고 대중화함으로써 동의를 획득하고, 이것을 통해서 전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력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통해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헤게모니에 의한 지배와 강제력에 의한 지배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헤게모니에 의한 지배가 보다 정상적인 상황이고, 힘과 강제력은 위기시에만 지배적이 된다고 보았다. 헤게모니 지배를 통해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 계급은 계급의식의 형성을 저지하고, 심화되는 위기 속에서도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르주아의 헤게모니가 계속되는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자기 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초월해서, 다른 계급과 사회계급의 이익을 결정함으로써 전체 사회세력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먼저 한 사회 내는 계급투쟁뿐만이 아니라 민권운동, 민족해방운동, 여성운동과 같은 대중적․민주적 투쟁이 존재한다. 헤게모니 개념은 계급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그 외연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고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서는 대중적․민주적 투쟁과 결합하여 민족적․대중적 집단의지를 형성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역사적 블록(historie bloc)을 형성해야 한다. 역사적 블록은 경제영역에서의 지도력과 시민사회의 사회세력의 지도력을 결합하여,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구분을 극복하고 통일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집단의지의 형성과정에서는 노동계급과 다른 동맹세력의 정치의식의 변화가 요구되는데, 이것을 위해서 지적․도덕적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지적․도덕적 개혁과정을 역사적 블록에 응집력을 부과하는 계속적인 이데올로기 투쟁 과정으로 본다. 그람시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단순한 문화투쟁 또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 이데올로기와 문화투쟁을 계급투쟁과 연관시켜서 상부구조-하부구조 전체를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두 구조간의 유기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헤게모니 개념을 파악하였다.

(2) 헤게모니와 국가․시민사회

그람시는 지배와 지도의 의미를 분리하여 사용하였다. 즉 국가․정치사회에서는 강제적인 지배로 통제되는 영역이고, 교회, 노동조합, 학교 등과 같은 사적조직은 헤게모니가 행사되는 역역으로 구분한다. 즉 상부구조를 법의 통치를 통하여 행사되는 ‘직접적 지배’ 와 지배집단이 사회를 통해 행사하는 헤게모니에 의한 지도의 두 개의 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해서 선진자본주의의 지배는 정치사회나 국가에 비해 시민사회가 우세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전략은 국가 권력의 급격한 장악보다 시민사회를 장악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문화적 투쟁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람시에 대해서 분석할 때 헤게모니를 강제력을 배제한 순수한 동의의 획득으로 파악하고, 헤게모니의 공간적 개념을 시민사회로 설정하여 정치사회와는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분석의 목적으로 강제력과 구분된 동의의 개념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국가를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포함하여, 현실사회의 헤게모니 지배는 동의와 강제력이 결합되어 국가체제에 대해서 행사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헤게모니는 시민사회의 정치사회의 복합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람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국가를 억압적 구조로 파악하고 경제적 이해관계의 종속변수로 보는 관점을 탈피하였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생산양식 뿐만이 아니라 사회세력의 힘의 역학관계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람시는 국가의 결정적 형태는 생산양식에 기초함으로써 기본적 계급의 이익에 대응하지만 형성의 주도권은 지배 블록의 특수한 분파에서 나오므로 블록의 경제적인 기본이익과 반드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람시의 사상은 하나의 개념이 다른 개념을 물고 들어오면서 서로 연관된 하나의 사고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람시의 사상 중에서 헤게모니 개념과 시민사회론은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게모니 개념은 특정 권력구조, 정치, 역사를 결정함에 있어서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의 특성과 사회구성체를 형성하는 총체적 차원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의 성격을 재정립하려는 시도로 발전된 것이다. 어떤 계급의 우월성은 지배와 지적․도덕적 지도라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사용한다. 지배란 강제를 의미하고, 힘에 의해서 사람들의 행동과 선택을 외적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지적․도덕적 지도란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규범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념을 형성하게 만들어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합의형식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내면적인 합의를 획득하는 지적․도덕적 지도가 헤게모니이다. 지배는 강제장치를 사용하여 정치사회에서 실현되지만, 지적․도덕적 지도는 ‘시민사회’에서 객관화된다. 교육적 종교적 단체적 제도의 총체인 시민사회는 헤게모니에 의한 합의형성으로 운영된다고 볼 수 있다. 헤게모니 합의의 획득은 구체적인 역사적 블록에 이해서 가능해진다. ‘역사적 블록’의 개념은 구조와 상부구조, 물리력과 이데올로기를 포괄하며 역사과정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을 거쳐 창출된 것이다.

시민사회를 구조에 위치 짓는 마르크스에 비해 그람시는 경제관계에서 분리시켜 상부구조에 배치하고 문화적․이데올로기적 관계의 모든 총체로서 적극적이면서 역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파악한다. 그람시의 시민사회란 지배적 집단이 전사회에 대해 행사하는 헤게모니 기능에 상응하는 ‘사적’인 기구의 총체이다. 상부구조를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로 분리하고 국가를 독재(정치사회)와 헤게모니(시민사회)의 확장된 개념으로 보았다. 상부구조의 역할에 중요성을 부과하여 피지배계급의 능동적 동의를 확보하는 실체적인 공간으로 국가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전략적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정치사회뿐만이 아니라 대항 헤게모니의 창출로서 시민사회를 먼저 장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권력을 장악한 헤게모니 집단은 불필요한 강제력을 동원할 필요 없이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를 존속시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람시는 진지전이라는 장기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1) 혁명전략-기동전, 진지전, 지하전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통해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는 강제력뿐 아니라 전체사회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보편화시키고 대중의 동의를 획득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며, 이러한 부르주아 헤게모니가 지속되는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전략으로 진지전과 기동전을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서구자본주의 발전에 대해서 상부구조의 영역이 확대되고 지배 이데올로기는 보다 제도화․내면화되는 상황에서 국가 권력에 대해 직접적 공격을 하는 기동전은 자본주의의 외피만을 파괴하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헤게모니 개념을 통해서 권력은 국가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시민사회에 다양한 확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국가권력의 장악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시민사회의 사회관게의 영역으로 확대시킨다. 노동계급은 시민사회의 계급 성격을 갖지 않은 다양한 대중적 민주투쟁으로 투쟁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민족적․대중적 집단의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부르주아 헤게모니에 대한 카운터-헤게모니를 창출하는 이데올로기 투쟁과정이고, 부르주아의 헤게모니를 분쇄하고 노동계급의 헤게모니에 의한 새로운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람시는 이렇게 시민사회의 정복과 정치적․문화적 지도력을 장악하는 진지전을 강조하면서, 진지전은 장기간의 인내와 창조성을 요구하는 과정이지만,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진지전은 무한한 인민대중에게 크나큰 희생을 요구한다. …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정치․역사적 상황의 막바지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정치에서는 진지전에서의 승리는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기동전과 지구전의 차이와 연관하여 유기적 위기와 국면적 위기를 구분한다 유기적 위기는 기존의 지배계급이 장기간 치유불가능한 구조적 모순에 처해 있는 상황으로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와해되고 재구성되는 단계이고, 국면적 위기는 정치세력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적 투쟁과 군사적 대치를 하는 일시적인 위기의 시기이다. 그는 하나의 역사적 시기를 분석할 때 유기적 위기와 국면적 위기를 정확하게 분석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헤게모니의 장악이 지속될 때에는 유기적 위기는 없고 국면적 위기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전략은 지배적인 가치체계를 변화시키는 진지전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헤게모니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유기적 위기를 도모할 담지자(전략을 세우고 지도할 수 있는 주체세력)는 누구이며, 유기적 위기의 도래를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의 제시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투쟁에 대한 방법론으로 대중의 교육과 도덕적 쇄신을 담당할 정당과 지식인을 언급하고 있다.

(2)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서 지식인과 정당


그람시는 사회주의의 건설은 자본주의의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부터 시작하는 되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체제 내에서 대중의 사고를 지적․도덕적 개혁을 통해 변화시키고 권력 장악후에도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 정치적인 이론을 언급하지 않는 것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적 사회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적으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관계가 발전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지도자와 시민의 관계를 제시한다. 그는 인민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참여를 통해서 집단의지가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인민은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을 실현하고 재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과정에서 인민의 참여와 민주주의가 확보되는 대중정치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암묵적으로 비판하고 권위주의적인 통치에 대한 비판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인민을 교육하고 헤게모니 투쟁에서 대중의 의식을 이끄는 주체로 지식인과 정당에게 임무가 부과된다. 지식인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지식인의 개념과는 다르게 한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주도하는 역할로 보았다. 이전의 생산양식을 대표하는 전통적 지식인은 지배계급에 수동적으로 봉사하지는 않더라도 제도적인 압력 등으로 인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배계급과 타협을 하게 되고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고 본다. 유기적 지식인은 특정한 사회계급을 대변하는 지식인이다.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유기적 지식인을 창출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노동계급의 체험으로부터 이론의 근거를 찾아내고 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해주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계급과 가장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집단적 지식인으로 정당을 이해하고 혁명과정에서 노동계급을 조직하고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당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정당은 정치적 역할뿐만이 아니라 교육적․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정당내에서는 엘리트의 지도와 대중의 참여가 조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당은 상식이나 전통적 세계관 등의 영향하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노동계급의 초기 의식이 구체적인 방향을 찾고 체계적 인 혁명의지로 발전되도록 의식적 지도와 규율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집단의지를 형성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프롤레타리아 문화와 윤리가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민족적-인민적 통일성을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4. 그람시 혁명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그람시는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독창적인 이론으로 인해서 주목을 받는다. 그것은 상부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현재성을 분석하는 노력에서 기인한다. 정치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사회구성체의 복합적 통일성, 경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등은 그람시의 이론적 성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람시의 서구사회의 혁명전략에 대해서 급격한 장악을 목표로 하는 기동전을 부정하고 시민사회의 복잡한 구조에 대한 점진적이고 계속적이 권력장악을 추구하는 진지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 고찰을 필요로 한다. 정치권력의 장악 이전에 문화적․도덕적 헤게모니의 장악이 실제적으로 얼마만큼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무릅쓰고서 헤게모니의 장악이 성취되는 것은 역설적인 주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진지전 전략은 이데올로기의 투쟁에만 중요성을 부여하고 국가권력의 장악과 강제력의 역할을 무시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과정에서 강제력이 배제된 문화적․이데올로기적 투쟁은 지배계급의 강제력에 의해서 분쇄될 가능성이 많다.(이것이 결정적인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억압기구를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강제력과 무력은 불가피하며 국제적 차원에서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 1차 레포트에서 언급한 나의 혁명관을 조금 수정해서 정리해보았다. 사회구조의 변혁을 위해서는 두가지 방법이 제기가 된다. 개혁을 통한 점진적인 사회변혁(진지전)과 혁명을 통한 급격한 방법(기동전)이다. 개인적으로 개혁과 혁명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지점을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러한 지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혁명은 급격한 사회변동을 통해서 현실을 이상에 단숨에 맞추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변혁과 정권교체는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사회의 하부단위까지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서는 민중 내부의 일부 이해관계가 폭력적으로 희생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결과 갈등 속에서 이상에 대한 회의와 수정이 불가피하며, 이상을 고수하려는 목적이 방법론을 지나치게 정당화시키는 부작용이 생긴다. 개혁을 통한 사회변혁은 하부단위에서부터의 현실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관점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정은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한 갈등은 실재하기 마련이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근본적인 문제들이 현실에 수긍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기본적인 사회구조의 틀 자체를 변화시킬 가능성은 대단히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람시의 혁명전략을 주목할 때 기동전과 진지전을 배타적인 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그람시는 사회의 성격에 따라서 (러시아와 중서부 유럽지역)진지전과 기동전의 적용차이를 나누었지만,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시기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위기에 대한 분석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람시는 전통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논리적 진행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면적 위기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헤게모니의 장악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에 유기적 위기와 같이 결정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국면적 위기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람시의 이론체계에서는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람시가 설정한 지식인과 당의 역할은 이러한 부분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당과 지식인의 역할문제로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람시는 지식인 집단의 형성에 대해서 ‘대중의 능동적 분자’를 고찰하고 있다. 즉 활동가는 현실을변혁하고자 하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자각과 함께 전통으로부터 생겨나는 전통적 의식 사이의 모순을 맛보게 된다. 헤게모니 투쟁에 있어서 실천만을 강조하는 소련과 같은 사태에 대해서 지식인 집단은 대중의 지적 발달을 조직하고 지도하여, 이론적 차원에서 활동하고, 그것을 실천의 차원으로 유지할 수 있는 변증법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정리하면 지식인은 사회집단과 지배계급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지배 계급이 그 기반으로서의 경제 구조에 기초하여 구축한 상부구조의 주도세력인 것이다.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이 두 영역에 걸쳐 있는 광범위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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