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인가 산업화인가?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토인비(A. Toynbee)가 1880~1년에 옥스퍼드의 밸리엘 칼리지(Balliol College)에서 행한 영국 산업 혁명 강의 내용이 그의 사후 출간되면서 널리 쓰여지게 되었다. 이후 산업 혁명에 대해 경제사 연구에 있어서 많은 관심과 논의가 집중되었으며, 다양한 연구 결과가 축적되었다. 산업 혁명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 보면 혁명이라는 용어의 사용 여부를 두고 두 갈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업 혁명에 대해서 전후 시대의 단절성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연속성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 실상 산업 혁명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근래에는 혁명이라는 용어가 주는 과격한 단절을 배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에서는 지난 약 1세기 동안에 있었던 산업 혁명 연구 성과에 대해서 산업 혁명의 혁명성 또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주장과 우연성 또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주장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산업혁명 – 단절론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일부 연속론자들을 제외하면, 토인비, 망뚜(P. Mantoux), 랜디스(D.S. Landes), 로스토(W.W. Rostow)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경제사 연구가들은 – 어떠한 면에서 본질적인 단절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강조하는 바가 다르지만 – 산업혁명의 단절성을 강조하면서 산업혁명이 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였음을 인정한다. 토인비에 의해 시작된 ‘사회적 변화설’은 경쟁시장의 성립을 중시하여 경제 활동이 중세적 규제에서 벗어나 시장기구에 의해 운행되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보았다.토인비는 산업혁명의 본질을 중세적 규제에 대신해서 경쟁원리가 나타난 것으로 보았으며, 이를 계승한 해먼드 夫妻(J.L. and B. Hammonds)는 산업혁명을 농업문명에서 공업문명으로의 변화과정으로 인식하면서 경제적인 면에서의 양적 개념이 아닌 사회혁명으로서의 질적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망뚜로 대표되는 ‘산업조직설’은 구래의 기능공 중심 또는 선대제 생산으로부터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전환한 것이 가장 혁신적인 것이며, 유동자본보다 고정자본의 비중이 커지고 산업노동자계층이 형성되는 것을 이러한 과정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망뚜는 생산방법의 발명과 이용, 자본의 집적과 대기업의 설립 및 보급, 새로운 사회계급의 형성과 계급간의 대립을 산업혁명의 일반적 성격으로 보았다. 랜디스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진보설’은 석탄을 비롯한 에너지 사용에서의 혁신, 각 종 기계의 발달, 합성원자재의 등장 그리고 공장생산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복잡한 기술진보를 산업혁명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즉 기술 혁신에 의해 추진된 생산기술의 급속한 변화와 그 결과 초래된 생산성 향상을 산업혁명의 핵심적 요인으로 인식한다. 랜디스는 산업혁명을 기계에 의한 인간의 기술과 힘의 대체, 화석 연료나 증기기관과 같은 비동물적 동력의 원천의 개발, 철과 같은 새로운 재료의 사용, 공장제로 불리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도입과 전파로 정의한다. 한편 로스토류의 ‘거시경제설’은 국민소득, 자본형성, 노동공급의 양적 성장이 급속히 가속된 것을 산업 혁명으로 이해한다. 로스토는 경제성장을 다섯단계로 나누고 산업혁명을 전근대적 성장에서 근대적 성장으로 전환하는 시기로서 이륙(take off)단계로 보았다. 한편 퍼킨(Perkin)은 산업 혁명을 ‘인간의 생활수단에 대한 접근방법의 혁명’이요, 인간이 ‘생태적 환경을 통제하는 데에서, 자연의 독재와 인색함으로부터 도피하는 능력에 있어서의 혁명’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연구가들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최초로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로 기술혁신과 공장제의 발달, 해외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나 풍부한 석탄과 철 등의 천부적 요건, 낮은 이자율과 이윤 인플레이션에 따른 자본의 축적, 18세기 인구의 급증과 결부된 시장의 확대와 수요의 증가, 자유방임주의에 의한 자유기업 선전가의 배출과 시류에 민감한 정치인의 출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정책, 새로운 과학과 지식, 프로테스탄티즘 등 여러 요인들을 지적해 왔다.


산업화 – 연속론

위에서 서술한 산업혁명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1970년대 이후 산업혁명은 지역적, 부문별로 극히 제한된 점진적 현상이었으며 그 효과도 작았다는 수정론이 대두되면서 설득력을 잃어 갔다.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비판하는 주장은 산업혁명기간 동안, 특히 초기에는 제조업 생산확대의 대종을 담당한 것은 선대제 농촌수공업의 확산이었으며 공장제 생산의 기여는 미미하였고, 새로운 에너지나 합성원자재 그리고 기계의 이용은 산업혁명기간이 훨씬 지난 후까지도 그다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빠른 생산성 향상을 보인 면방직 공업의 경우에도 증기기관의 이용은 매우 느린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또한 합리적 정신이나 부르주아 멘탈리티도 이 당시에 급속히 퍼진 것이 아니고 귀족문화가 오랫동안 잔존했다는 것이다. 시장을 통한 자원배분도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왔다고 보았다.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1970년대 중반 이후 대두된 ‘제한 성장론’을 들 수 있다. 제한 성장론은 195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총략적 경제 지표를 통한 산업 혁명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딘(P. Deane)과 콜(W.A. Cole)이 제시한 추계와 그것에 대한 1980년대의 수정 추계가 그것이다. 특히 리글리(E.A. Wrigley)와 스코필드(R.S. Schofield)의 인구 통계, 린더트(P.H. Lindert)와 윌리엄슨(J.G. Williamson)의 사회직업 구성 분석, 할리(C.K. Harley)의 공업 생산 추계가 제한 성장론의 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연구 성과는 딘과 콜의 추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리글리와 스코필드는 18세기에 연평균 0.73%의 인구 증가율을 제시했고, 린더트와 윌리엄슨은 17세기 말의 농업인구를 전체의 약56%로 보았다. 한편 할리는 1770~1815년의 영국 공업 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1.65%정도로 산업 혁명 시기 영국에서 그리 현저한 공업 생산 증가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크래프츠(N.F.R. Crafts)는 계량 경제사의 기법을 적용하여 산업 혁명 시기 영국의 경제를 총량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는 산업 혁명을 소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영국에서 면직물 공업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물품생산을 위한 소규모 수공업에 여전히 많은 고용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러한 분야에서는 일인당 생산량의 증가에 대한 기술적 진보의 영향력이 적다는 점에서 산업 혁명의 단절성을 비판하였다.


위와 같이 산업 혁명에 대한 논의는 약 1세기동안 지속되어 왔다. 전통적인 견해는 산업혁명의 단절성을 주장하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보았고, 이에 대해 최근에는 총체적 경제지표를 제시하면서 과거 산업혁명 시기에 뚜렷한 변화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산업혁명의 단절성을 비판하고 있다.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으며, 지금까지의 산업혁명에 관한 논의는 산업혁명을 자본주의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를 놓고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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