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nard Slicher van Bath,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

1) 농업발전에 있어서의 외부요인들[ref] Bernard Slicher Van Bath [/ref]

농산물 시장의 성립과 농산물 가격의 형성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격을 매개로 접촉하게 한다. 가격은 유통 중에 있는 화폐의 수량과 화폐가 유통하는 속도에 좌우된다. 농업생산은 한편으로 여러 지역에서의 농경지 면적에 의해서 그리고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인구와 농업기술 및 지식 수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소비는 농업인구와 비농업인구를 포함한 인구의 총수에 의해서 좌우된다. 생산은 농업생산과 함께 비농업생산이 포함된다.

2) 농업발전단계 : 식량소비면에서의 변화를 기초로 한 농업사의 시대구분 .

① 폐쇄적 가족경제 : 각 가족이 소비하는 것을 가장 스스로 또는 그의 가족원의 조력으로 생산하여 조달하는 단계

② 직접적 농업소비(500~1150년) :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급하면서 동시에 현물 형태로 비농업 분야의 인구 집단에 식량을 공급하는 단계. 불완전한 화폐경제

③ 간접적 농업소비(1150~현재) : 소수의 인구가 자급하면서 비농업 분야의 인구 전체와 때로 농업인구의 일부가 잉여 농산물을 가진 지역에서 농산물 시장을 통해서 식량을 조달하는 단계. 교환이 확대 되어가는 농업사회

2. 직접적 농업 소비 시대(중세초기의 농업형태:500~1150년)

봉건제는 봉토제와 장원제로 구분되어진다. 중세기의 봉토제는 봉주와 봉신 사이의 개인적 유대관계 위에 축조되어 봉토를 매개로 봉토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봉토제는 카롤링 제국의 루아르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지역, 부르고뉴에서 발견된다. 영국에는 1066년의 노르만 정복이후에 도입되었다. 봉토제는 자연경제의 산물이다. 봉주는 그의 봉신들과 관리들에게 화폐로 보수를 지급할 처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나 그 토지의 생산물로 보수를 지급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봉주는 유대관계를 맺어나갔다. 봉신은 지원과 조언을 제공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장원제는 화폐가 부족한 이 시대에 봉토의 경영수단으로 생겨났다. 장원은 영주지와 농민보유지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농노는 현물형태로 생산물을 장원에 공납할 의무를 지며, 장원에 부역을 제공해야 했다. 뒤에 농노들은 상속 및 결혼과 관련해서 제한을 받았고, 장원 영주나 그의 대리인의 재판권의 지배를 받았다. 영주는 농노들이 조달하는 물품을 장원현지에서 소비했다.

(장원제에서의 토지소유유형)

1. 장원들로 조직된 소유지 : 토지를 예속 농민들에 의해서 경작됨

1) 왕, 부유한 교회기관 및 부유한 세속인들의 대소유지, 수백개의 농민보유지로 구성

2) 소지주들의 소유지, 이런 소유지는 10여개의 농민 보유지로 구성되어 있음

2. 장원으로 조직되지 않은 소유지 : 소유자 스스로 토지를 경작

1) 쟁기와 한조(span)의 역축을 가진 농민들(laboratores)의 소유지. 한두명의 농노들의 조력으로 경작

2)쟁기와 역축을 갖지 못한 농민들의 소유지, 이들 농민들은 부족한 소득을 위해서 예속되어 일하기도 함

(농민보유지의 분포에 따른 장원의 유형)

1. 촌락 내의 모든 농민보유지를 포괄하는 자원(단일장원:the unitary manor)

2. 농민보유지가 자원에 포함되어 있지만, 동일 촌락 안에 다른 영주의 농민보유지들도 병존하는 장원(집중형:type ramasse)

3. 장원의 농민보유지가 몇 개의 근접한 촌락들에 나뉘어 있으며, 다른 영주의 농민보유지와 병존 하는 장원(군집형:type groupe)

4. 농민보유지들이 다수의 촌락에 흩어져 있지만, 각 촌락에는 그 장원에 속하는 농민보유지들이 단지 몇 개만 있는 장원(분산형:type disperse)

3. 간접적 농업 소비 시대(중세 후기의 농업형태:1150~1550년)

1) 1150-1300년:조숙한 호황기

12세기에 서유럽과 남유럽은 번영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곡물가격이 상당히 상승한 사실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이 시기의 곡물가격은 약 100년 내 밀 가격은 거의 세배나 상승하였다. 모든 생산물의 가격이 똑같이 올랐던 것은 아니므로, 유례없이 높은 곡가는 인구증가 때문임에 틀림없다.

12-13세기의 인구 증가는 한 세대의 농민 가족이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농민보유지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인간의 주거 한계선이 넓어지면서 대규모 개간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종량 대 수확량의 비율이 떨어지는 원인이 한계지, 즉 별로 비옥하지 않은 토지의 경작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비율 하락은 경작지에 대한 충분한 시비를 불가능하게 하는 가축 사육의 축소 속에 곡물농업이 과도하게 확대된 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 높은 곡가는 농업에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농촌경제에 대한 저술과 농법서들의 출현을 가능하게도 하였다.

2) 1330-1450년:인구격감기

이전 시기의 번영에 대해서 반작용이 따랐다. 인구는 감소하고 귀금속의 채굴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주화의 은함량은 평가절하를 통해서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었다. 이전 시기에 진행되던 개간과 간척 사업이 중단되었다. 곡가가 낮은 이 시기에는 보다 나은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축산업이 선호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경작지는 목초지로 바뀌었다. 축산업의 확대로 인해 유제품등이 생산이 활발해 졌고, 각 지역에서 사료작물의 재배 기록도 발견할 수 있다. 또 한가지 다른 방법으로 환금작물의 재배를 들 수 있다. 환금작물은 곡물보다 더 크고 더 탄력적인 공산품에 대한 수요로부터 수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홉, 아마, 대마, 염료 식물 등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파종량대 수확량의 비율은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계지 경작의 중단이나 축산물 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가축 사육의 증대와 이에 따른 경작지 시비량의 증대 그리고 생산증대를 통해서 곡가 하락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려는 농민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역시 앞전 시기에 발전했던 농업기술은 이 시기 주목받지 못했다.

3) 1450-1550년:완만한 회복기

1450년 이후의 시기는 불황 후의 회복기, 즉 전형적인 이행기였다.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고, 1460년 이후 중부 유럽에서는 은 채굴이 증대되었다. 인구 증가와 화폐수량의 증가 모두 곡가의 완만한 상승과 실질임금의 하락을 초래했다.

농업분야에서는 곡물의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농지 면적은 개간을 통해서 확장되었다.

4. 간접적 농업 소비 시대(근대의 농업과 농촌:1550~1850년)

1) 1550-1650년:가격혁명기

중세의 불황이 16세기의 호황으로 옮아가게 된 원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귀금속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나타났다. 그 원인은 인구의 성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화폐 수량의 증가를 초래한 중부 유럽에서의 귀금속 채굴의 재개일 것이다. 농업부문에서 자연스럽게 곡가의 상승이 야기되었다. 곡가 상승에는 지리상의 발견, 수송의 확대를 위한 말의 수요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료작물의 확대는 식량용 농산물의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리상의 발견을 위한 항해 결과, 시장이 확대되고 유럽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것도 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 시기의 가격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특히 16세기는 여러 원인들이 중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더 복잡하거나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다.

높은 곡가에서 기인하는 상황은 농업에 유리한 상황을 형성하였다. 경종농업이 발달하였으며, 이것은 무엇보다 개간, 배수 및 간척에 의한 경작지 면적의 확대로 나타났다. 그 외에도 목초지의 곡물경작지로의 전환과 수확고를 높이기 위한 시비량의 증대와 같은 활동도 나타났다. 역시 농학을 주제로 한 많은 서적의 출간은 농경의 중요성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2) 1650-1750년:불황기

17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기의 시대였다. 그 위기는 사람들의 생활 욕구, 감정 및 의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17세기는 16세기의 가격혁명과 18세기의 물가상승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17세기를 경제적 위기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서유럽의 극심한 변동들도 단절되고 특별히 장기간 지속된 불황을 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의 불황은 중세 후기의 심각한 경제적 쇠퇴보다는 덜 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주요징후, 곡물가격의 하락, 높은 실질 임금, 개간활동의 정지, 경작지의 목초지로의 전환, 가축 사육의 확대, 사료작물의 재배, 환금작물의 재배 등의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17세기의 위기국면에 대해서 그것이 진정한 위기였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위기’라는 측면에서 흔히 17세기는 14세기와 15세기의 봉건제의 위기국면과 비슷한 양상에서 설명되어지는데, 전반적인 개관에서는 심각한 경제위기라기보다는 재조정, 체제의 공고화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봉건제의 위기는 이미 본질적으로 넘겼으므로 위기는 아니었으며 이미 진행중인 자본주의 경제 내부에서 일어난 재조정 과정이었던 것이다. 17세기 경제의 건설적인 면을 살펴보면 수축국면에 대한 대비로 국가구조의 강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국가 구조의 강화는 갈등과 전쟁에 있어서 귀족간의 다툼이 아닌 국가간의 다툼으로 나아가게 하여 이 과정에서 탄력적으로 경제적 힘을 키우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가 있었다. 또한 이시기에 영국 농업경제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착실한 진보를 이룩하였다.

17세기 경제상황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1450년에서 1750년을 자본주의 이행기로 설정하는 것은 이행 개념을 실체화하여 순수한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깎아내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17세기의 수축국면은 체제의 위기가 아니라 체제의 공고화 과정이었다. 장기16세기의 시기에 일어났던 변화에 대해서 재정립되는 시기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17세기의 ‘위기’는 자본주의 형태와 구조의 안정화를 꾀한 시대였으며 이 상황 속에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후의 시대로 도약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3) 1750-1850년:높은 유아생존율 시기

18세기의 경제변화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인구적인 측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쟁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1600년에서 1750년까지 잉글랜드의 인구성장률이 완만했다는 주장과, 사실상 정체상태였다는 주장, 50%정도의 성장률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들이 있다. 이 시기의 통계는 1721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세기 전반부부터 상당한 인구 증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구변동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러한 이유들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18세기의 사회․경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망률의 감소를 살펴볼 수 있다. 1670~80년에 32.4세였던 영국의 평균 수명은 1810년대 말에는 38.7세로 한 세기 사이에 6.3세가 높아졌다. 그와 같은 사실은 조 사망률의 변동에서도 나타난다. 1670~80년에 30.7에서 1810~29년에는 24.5로 감소했다. 이러한 사망률의 감소는 의학발달에서 첫 번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병원과 시약소의 증가, 의학 교육과 연구의 발전, 대중의 위생수준 향상 등으로 질병에 대한 치료와 대처로 사망률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살펴볼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로는 가족 재구성법을 바탕으로 추계된 유아사망률의 변화이다. 이것은 18세기 초에 1,000명당 191명이었던 유아 사망률이 세기 말에는 150으로 감소했음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약 5%의 조 출생률의 증가를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식량의 총공급량이 인구 변동의 결정적인 변수였다고 해석될 수 있다.

우선 매우 급속한 인구성장과 화폐수량의 증가는 공업과 농업생산의 증대를 초래하였다. 곡물가격을 중심으로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즉, 호경기에는 시장에 내다 팔 얼마간의 잉여를 생산할 수 있는 소농이 불경기에는 화폐수입을 상실하고, 소농의 경쟁이탈로 인해서 대규모 농장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낮은 곡물가격이라는 불행한 요인은 그것이 농업혁신으로 이어지는 행운을 가지고 왔다. 특히 영국에게 있어서 낮은 곡물가격이 이득을 가지고 온 것은 1688년에 영국 정부가 국물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제정한 곡물보조금법이 농업 확장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했다는데 있다. 곡물의 배출구는 제조업과 양조업이었는데 이러한 생산물은 장기적인 불황기에서 실질임금의 증가를 겪었던 도시 노동인구에게 기대어 있었으며, 국제시장에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싼 곡물의 수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영국은 세계 곡물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고, 1700~50년 시기 목초지에 대해서 경작지가 회복되는 데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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